이전 글에서 외환보유액(외환보유고)이 무엇인지와 그 기회비용에 대해 알아보고 이달 초에 나온 뉴스 기사(외환보유고 감소)도 함께 다뤄봤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경제기사 궁금증 300문 300답(곽해선 저. 혜다)'에서 외화보유고 감소가 왜 위험한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997년 후반 우리나라는 대기업 연쇄 도산으로 시작된 불황과 함께 전에 없던 외환위기를 맞았습니다. 외환위기란 국민경제가 대외 통상에 쓸 외환이 부족한 사태입니다. 국제 거래에서 주로 쓰는 외환은 미 달러이므로, 결국 달러가 부족할 때 발생하는 국가 차원의 경제위기입니다.
달러 부족이 왜 위기인가?
달러 없이는 상품 수출입 등 대외 거래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동차 운행과 공장 운영에 필요한 원유를 비롯해 생산이나 소비에 필요한 물자를 들여올 수 없으므로 기업과 공장이 문을 닫아야 합니다. 대량 실업이 발생하고, 물가가 폭등하고,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은 폭락하면서 금융과 경제가 통째로 마비될 수 있습니다.
달러 부족이 그렇게 문제가 된다면 국가 차원에서 빌리든 바꾸든 달러를 구하면 될 일 아닌가 싶지만, 쉽지 않습니다. 외환위기가 임박한 나라는 통화 시세와 국민경제의 대외 신용이 폭락하기 때문입니다. 국내에 달러가 없으니 해외에서 들여와야 하는데, 어디든 시세가 폭락하는 통화와 달러를 바꿔줄 리 없습니다. 신용이 바닥을 치는 나라에 달러를 빌려줄 이도 없지요.
달러가 부족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투기 세력이 외환 투기에 나서면서 상황이 악화되기 쉽습니다. 국제 자산시장에는 항상 거대 자본으로 외환이나 주식 등 투자자산을 매매해 단기 차익을 노리는 투자 집단이 움직입니다. 이들은 특정국에 보유 달러가 부족하다는 낌새를 채면 즉시 외환 거래 시장으로 자본을 옮겨 해당국 통화 시세가 폭락하는 쪽에 베팅합니다. 투자시장에서 거대 자본이 움직이면 다른 투자자도 가세하기 쉽고, 이렇게 통화 투기 대상이 된 나라는 통화 시세 폭락과 달러 유출이 극심해져 외환위기로 직행하기 쉽습니다. 1997년 우리나라도 그랬습니다.
외환보유고는 국가신용도와 연결
외환보유고(외환보유액)란 평소 각국이 보유하는 대외 외환 채권 총액, 간단히 말해 보유 외환 총액입니다. 자국에 본사나 본점을 둔 굵직한 기업이나 금융기관이 외국 거래처에 진 빚을 갚지 못할 정도로 경영난에 빠질 때 정부가 대신 갚아주는 데 씁니다. 일개 기업이 진 빚을 정부가 갚아대신 이유는 국가신용도가 추락할까 봐 우려되기 때문입니다. 국가신용도는 한 나라가 대외 거래를 계속할 수 있느냐 여부를 좌우하는 중요한 평가 척도입니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평소 각국 경제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주요 기업과 거래하면서 해당 기업의 신용도를 주시하고, 혹 신용이 흔들릴 경우 해당국 정부가 대신 감당할 능력이 있는지를 국가신용도로 평가합니다. 만약 외환보유액(중앙은행이 평소 보유해 두는 외화)이 부족하면 정부의 사태 수습 능력을 믿을 수 없으니 거래를 끊습니다. 국가신용도가 추락하면 대외 거래가 끊기는 셈입니다.
1997년 우리나라는 연말에 만기가 돌아오는 대외 단기부채를 갚는 데 필요한 외환(외환보유고)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역플라자 합의로 인한) 엔저로 수출에 불리해지면서 경영이 어려워진 대기업이 끝내는 연초부터 도산하기 시작하고, 이어 금융기관도 도산 행렬을 짓다 보니 부족한 달러를 메울 길이 없었습니다. 한국에 외환이 부족하다는 점을 눈치챈 해외 투기 자본은 원화 폭락에 거액을 베팅하는 환투기에 나섰고, 결국 외환시장에서 대량 매도가 쏟아짐으로써 원화 시세는 단기간에 폭락했습니다.
원화 폭락은 가뜩이나 달러가 부족한 사태를 급격히 악화시켰습니다. 국내에 들어와 있던 외국 자본이 자산을 처분해 달러로 바꿔 들고 떠나기 시작했고, 투기 자본의 외환 투기 공세와 외국인 자본 유출 원화 폭락세가 거세지자 원화로는 더 이상 달러를 살 수도, 빌릴 수도 없게 됐습니다. 다급해진 정부는 미국과 일본에 긴급 달러 융자를 청했지만 거절당했고, 결국 연말에는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며
이번 글에서는 외환보유고, 그러니까 달러가 부족해지면 국가경제가 위태로워지는 이유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미국을 제외한 국가들이 위기에 빠지는 과정은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달러가 부족해지면 국가신용도가 떨어지고, 이렇게 되면 다른 나라와 거래를 하기 힘들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지다가 결국 붕괴하게 되고 마는 것이지요. 요 몇 년간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문제가 계속 나오고 있는데, 투자자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대응책을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특히 지금과 같은 강달러 환경에서 말이지요. 늘 그랬듯이 누군가에게는 위기가 될 수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투자자분들도 부디 계획을 잘 세워서 기회로 만드시길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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