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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격자모형

5. 핸런의 면도날_악의로 설명하기 전에 어리석음을 의심하라

by Blueorbit 2026.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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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나쁜 사건은 나쁜 사람의 나쁜 행동 때문이라고 결론 내리기 쉽다.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남의 탓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어리석어서 생긴 결과인 경우가 많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면 극단적인 피해망상과 이념에서 벗어나게 된다.

 

악의보다 흔한 것은 어리석음이다

핸런의 면도날(Hanlon's razor)은,

어리석음으로 충분히 설명되는 일을 굳이 악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격언이다.

1980년 로버트 J. 핸런이 머피의 법칙 모음집에 보낸 문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지며,

오컴의 면도날처럼 그럴듯하지만 불필요한 설명을 잘라내는 사고 도구다.

 

오류를 교정하려는 것은 심리학이 말하는 기본적 귀인 오류다.

우리는 남의 나쁜 행동을 상황이나 실수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나쁜 본성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세상의 나쁜 사건을 보면 나쁜 사람이 나쁜 의도로 저질렀다고 결론짓기 쉽다.

그것이 사실일 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악의보다는 단순한 실수, 무능, 부주의, 혹은 그저 우연이 더 그럴듯한 설명이다.

악의를 가정하면 마음이 편한 구석이 있다.

분명한 악당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편안함은 진실과 무관하며,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 적을 머릿속에 만들어낸다.

 

이 격언이 강조하는 바는 이 면도날을 자기 자신에게도 돌리라는 것이다.

내게 일어난 나쁜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내 판단 착오나 준비 부족 탓은 아닌지 먼저 묻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극단적인 피해망상과 이념에서 벗어나게 된다.

모든 불운을 누군가의 음모로 해석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적으로 가득 찬 곳이 되고, 판단은 점점 더 왜곡된다.

 


투자와 기업 분석에의 함의

투자에서 이 면도날이 가장 자주 필요한 순간은 시장과 뉴스를 해석할 때다.

주가가 급락하거나 시장이 이해하기 힘든 방향으로 움직이면,

작전 세력이 개인을 노렸다거나 공매도 세력이 음모를 꾸몄다거나 당국이 일부러 시장을 망친다는 식의 해석이 솔깃해진다.

그러나 대개는 누군가의 악의가 아니라 강제 청산, 지수 편입과 편출에 따른 기계적 매물, 서툰 의사소통, 단순한 착오 같은 비인격적 요인이 더 그럴듯하다.

음모의 틀로 시장을 보기 시작하면 분석은 사라지고 분노와 이념만 남는다.

 

2010년의 이른바 플래시 크래시 때도 많은 이들이 거대한 작전 세력의 의도적 공격을 떠올렸지만,

사후 분석이 가리킨 핵심 원인은 유동성이 얇아진 상황에서 알고리즘 매매가 연쇄적으로 맞물린 비인격적 메커니즘이었다.

악당을 상상하기는 쉽지만,

진짜 원인은 대개 그보다 덜 극적이다.

 

경영진을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다.

회사 실적이 나빠졌을 때 그것이 경영진의 의도된 기만인지, 평범한 실수와 불운인지, 아니면 잘못된 인센티브에 합리적으로 반응한 결과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찰리 멍거가 인센티브를 보여주면 결과를 보여주겠다고 말했듯,

많은 기업의 어리석어 보이는 행동은 사실 왜곡된 보상 구조가 만들어낸 합리적 반응이다.

악의나 무능으로 단정하기 전에 그 사람이 어떤 인센티브 아래 있었는지를 보면 더 정확한 그림이 나온다.

예컨대 단기 주가에 연동된 보상을 받는 경영진이 장기 투자를 줄이고 자사주 매입에 치우치는 것은,

그가 어리석거나 악의적이어서가 아니라

주어진 보상 구조에 충실히 반응한 결과일 때가 많다.

그렇다면 비난할 대상은 개인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유도한 구조이며,

투자자가 점검해야 할 것도 바로 그 인센티브 설계다.

 

가장 중요한 적용은 자기 자신의 실패를 복기할 때다.

투자가 잘못되면 자아는 시장을, 공매도 세력을, 운을 탓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핸런의 면도날을 안으로 돌리면,

더 흔한 원인은 내가 사업을 잘못 판단했거나 비싸게 샀거나 반대 증거를 외면했다는 사실이다.

외부의 악당을 지목하는 대신 자기 실수를 정직하게 인정할 때에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이것은 자책이 아니라 정확한 귀인의 문제다.

통제할 수 없는 일까지 모두 자기 탓으로 돌리라는 것이 아니라,

진짜 원인을 정직하게 찾으라는 것이다.

 


모델의 한계와 오용

핸런의 면도날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다.

 

첫째, 악의도 무능도 아닌 제3의 설명이 가장 정확할 때가 많다.

복잡한 시스템 안에서 각자 자기 이익을 좇아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외부에서 보면 음모나 집단적 어리석음처럼 보이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어리석음을 기본값으로 두기보다,

어떤 인센티브와 구조가 이 결과를 낳았는지를 먼저 묻는 편이 더 정확하다.

 

둘째, 이 면도날은 악의가 결코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드물지만 진짜 사기와 악의는 존재한다.

엔론과 와이어카드는 단순한 무능이 아니라 의도된 기만이었다.

핸런의 면도날을 맹목적으로 적용하면 진짜 악당 앞에서 순진해진다.

기본값은 악의 없음으로 두되,

구체적 증거가 악의를 가리키면 즉시 면도날을 내려놓고 단호하게 파고들어야 한다.

이 면도날은 출발점이지 면죄부가 아니며,

어리석음으로 설명된다고 해서 그 행동이 용서받는 것도 아니다.

 

셋째, 자기 자신에게 돌릴 때도 균형이 필요하다.

정확한 귀인이 목표이지 자기 처벌이 목표가 아니다.

모든 손실을 자기 탓으로만 돌리면

정상적인 변동성이나 통제 밖의 사건마저 자책의 대상이 되어, 오히려 합리적 판단을 해친다.

핵심은 책임을 정확히 나누는 것이지 한쪽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모델 역시 홀로 쓰일 때보다 격자의 다른 모델과 함께 쓰일 때 제 역할을 한다.


체크리스트와 연결

핸런의 면도날을 절차로 만들면, 나쁜 일이 벌어졌을 때 반응하기 전에 던지는 질문이 된다.

 

첫째, 지금 나는 이 사건을 누군가의 악의로 해석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악의 말고 실수, 무능, 인센티브, 우연으로 설명할 길은 없는가.

 

둘째, 이 행동을 만든 인센티브 구조는 무엇인가.

악의나 어리석음으로 단정하기 전에 보상 구조를 먼저 본다.

 

셋째, 손실을 복기할 때 나는 외부의 악당부터 찾고 있지 않은가.

내 판단의 어떤 부분이 틀렸는지를 먼저 적는다.

 

넷째, 그러면서도 진짜 악의의 증거는 없는가.

구체적 신호가 보이면 면도날을 내려놓는다.

 

시장과 종목과 경영진에 대한 내 서사가 점점 더 악당으로 채워지고 있다면,

그것은 분석이 이념으로 미끄러지고 있다는 경고 신호다.

그때는 한 걸음 물러나 더 단순하고 비인격적인 설명을 먼저 검토한다.

적이 줄어들수록 보이는 선택지는 늘어난다.

 

 

이 모델은 격자의 다른 모델과 곧바로 이어진다.

핸런의 면도날은 인간 행동에 적용한 오컴의 면도날과 같아서,

타인의 행동을 설명할 때 가장 가정이 적은 쪽이 대개 악의가 아닌 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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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음모의 서사를 쌓는 일은 확증 편향이 악당의 증거만 모으는 것과 같으므로,

자기 손실을 안으로 복기하는 일은 반증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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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진짜 사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영구 손실을 피하려는 배제의 법칙이 늘 함께 작동해야 한다.

면도날은 평소의 기본값을 정해줄 뿐,

예외를 알아보는 눈까지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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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판단은 전적으로 투자자 본인의 책임이며,

이 글은 특정 종목의 매수나 매도를 권유하지 않는다.

언급한 사례는 개념 설명을 위한 것일 뿐 투자 추천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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